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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이야기 개항 100년의 상징물 부산대교

작성일 2016.11.30조회수 613작성자 (주)대성문

부산항에는 다리가 많다. 해운대에서 신항 가덕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다리가 바다 위를 가로지른다. 부산 최초의 다리인 영도대교가 1934년 개통되면서 다리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어 부산대교, 신호대교, 광안대교, 거가대교, 남항대교, 을숙도대교, 가덕대교 등이 순차적으로 건설돼 나름대로 개성있는 자태로 부산해안순환도로망을 구축하고 있다.

 

 

 

▲개항 100주년 기념 상징물인 부산대교 개통 이후의 1980년대 부산항의 전경.

 


하지만 이들 다리 중 유일하게 지금의 해안순환망과 거리가 먼 다리가 하나 있다. 부산이란 명칭을 단 부산대교이다. 본래 이 다리는 영도와 부산시내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건설돼 도시고속도로망과 관련이 깊다. 그동안 영도는 부산항의 배후산업물류단지로서 급성장을 하다 보니까 이 지역으로 드나드는 물동량을 소화시키려면 새로운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여기에 영도대교마저 노후돼 도저히 컨테이너차량들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더욱 다리건설이 시급했다.

 

개항 100년을 밝히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부산항을 내리쬐는 1976년 1월 5일 당시 박영수 부산시장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역점사업 첫 번째가 제2부산대교(당시 영도대교가 부산대교였음)임을 밝혔다. 그래서 부산대교의 건설 취지에는 '개항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 관문인 부산에 우리나라의 산업발달의 상징성'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산대교의 육지 쪽 다릿발이 선 자리가 예전의 초량왜관의 선착장이란 데 있다.

 

초량왜관은 부산항이 강제로 개항되면서 일본인 전관거류지역이 됐고 바로 이 선착장이 당시 부산항의 중심으로서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개항관문 역할을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곳에 개항100년의 상징인 건축물이 섰으니 말이다.교량 공사는 그해 10월 8일 기공해 1980년 1월 30일 준공됐다.

 

다리 개통식은 오후 3시에 열렸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6000여 명의 부산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테이프커팅을 한 다음 부산시청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부산대교는 미적 감각을 살려 견고하게 만든 부산의 자랑"이라 치하하면서 "다른 도는 물론 서울도 이를 모범으로 삼아 공공건축의 경우 하나를 지어도 후손에게 남겨 줄만하게 아름답고 튼튼하게 만들도록 해야겠다"며 벤치마킹 대상건축물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자그마치 40개월에 걸쳐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면서 우리의 기술과 자재로 완공시킨 국내 최초의 3경간(徑間) 아치교였기에 더욱 자랑거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쉬움도 있었다. 부산항 100년의 상징물을 지으면서 67년이나 된 부산항의 상징 건축물 하나가 다리 진입로를 만든답시고 대안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산시지방문화재 22호였던 르네상스풍의 부산세관 옛 청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때문에 한때 '부산세관 옛 청사와 맞바꾼 부산대교'란 말이 회자됐다. 부산대교에서 나오는 대교로와 부둣길 충장대로와의 만나는 기점에 부산세관의 옛 청사가 서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부산세관 옆 '세관삼거리'는 하나의 희생 속에 생긴 명칭이 아닌가 싶다. 부산대교란 이름도 영도다리의 본명이 아닌가. 이래저래 오늘날 부산대교는 남의 도움 속에 부산항 개항 100년의 상징 다리가 되었다고나 할까.